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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느냐? 왜적이 침범해서 역사책을 불태우고, 내란이 일어나서 우리 나라 역사책을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의 의해서’ 왜곡이 됐다.” 고 얘기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왜구나 내란의 병화에 의해서 그 역사가 왜곡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됐다는 것이다. 김부식, 김일연, 더 나아가서는 조선시대에 와서 『동국통감』을 지은 서거정이라든가 하는, 그런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됐다는 것이다.
삼독(三毒)에 의해 왜곡되었다
재야사학자들과 민족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를, 세 가지, ‘삼독(三毒)’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삼독의 피해’라고 얘길 하고 있어요. 삼독. 세 가지의 독소라는 거예요. 중독, 왜독, 양독.
중독(中毒), 이것은 ‘사대주의사관’에 의해서 왜곡된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왜독(倭毒), 이건 이제 ‘식민주의사관’이죠? 그 다음에 양독(洋毒), 지금의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는 ‘실증주의사관’, 달리 ‘랑케사학’이라고 얘기하죠. 이 세 가지 삼독의 피해에 의해서 우리 역사가 왜곡되었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어요.
1. 중독(中毒) : 사대주의사관
우리나라에서 사대주의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A.D. 608년에 신라 원광법사(화랑의 세속오계 지음)가 수나라에 걸병표(乞兵表) 보낸 사건, 즉 군사를 좀 빌려달라 했던 그 일을 사대주의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사대주의가 발효된 것은 ‘신라에서 A.D. 650년, 당나라 고종, 영휘(永輝) 원년에 당나라 연호를 갖다 쓰면서 사대주의가 실제 시작됐다’ 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연호를 썼다는 것은, ‘속국(屬國)’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A.D. 649년에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서 죽는다. 그 해에 고종이 등극을 했는데, 그 때를 즉위년이라고 하고, 그 다음 해, 650년을 ‘원년(元年)’이라고 하고 개원을 하는데, 이 때부터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연호를 신라에서 갖다 써 가지고, 사대주의의 뿌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 때는 당나라, 그 다음 고려시대 때는 송나라, 조선시대에 와 가지고는 명나라, 청나라. 이렇게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사대주의이며,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역사를 쓰는 역사학자들이, 아(我)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우리 역사를 쓰는 게 아니라,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게 된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얘기라 아니할 수 없다.
『삼국사기』의 사대성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김부식이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 김부식의 혈통을 보면, 김부식의 이름 속에 이미 사대주의가 들어가 있다. 김부식이 셋째 아들인데, 김부식의 아버지가 김관(金觀)이란 사람이다. 김관이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중국에는 소동파, 동생인 소철, 소식, 이들이 유명하니까, 자기 셋째 아들의 이름을 소식에서 ‘식’ 자를 따서, 김부식(金富軾)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은 소철의 철자를 따서, 김부철(金富轍)이라고 짓는다. 사대주의 정신이 자기 아버지때부터 묻어나온 것이다.
김부식이 책을 쓸 때 얼마나 중국의 입장에서 쓰고 있는지 살펴보자.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적대국이었으니까 중국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어떻게 적혀 있냐 하면,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임금께서 장차 토벌할려고 했다." 중국놈들은 고구려를 이렇게 쓰면 되지만, 김부식은 우리 나라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쓴 것이다. 이것은 중국사람 입장에서 쓴 거지, 우리 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다.
『삼국사기』라는 것이 이런 정도로 그 주체성을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 다음에 그 진덕여왕 4년에 영휘연호를 썼는데, 거기다 또 자기가 주석을 달아놨다.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냐? 당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야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까, ‘과이능개(過而能改)라’.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렇게 써놓았다.
이건 정신병자가 아닌가? 역사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면 되는 거지. 그건 아, 중국의 속국이 안 돼 가지고 안달하는 사람 아닌가? ‘왜 진작 연호를 말이야 버리지 않았느냐? 꾸지람을 듣고서도 못 버리다가, 이제 연호를 쓰니까 참 잘 됐다.’라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정신상태라면, 이건 나라를 가지고 중국에 걸어 들어가서, 나라를 갖다 바칠 사람이 아닌가?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에 굴하지 않고 맞받아 싸운 것은 불의였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백제가 당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항전한 죄로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썼는가 하면 고구려-신라-백제 세 나라가 오랜 역사를 능히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지나인(중국인)의 후손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부식은 위대한 지나인(중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오랜 역사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늘어놓았다. 이러한 것은 삼국사기가 저질러 놓은 역사왜곡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사학자 신채호, 문정창 두 분의 연구에 따르면
첫째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생존 당시에는 물론이고 조선조 말까지 엄연히 존재하였던 단군조선에 관한 숱한 기록들 예컨대 조대기, 고조선비기, 지공기, 삼성밀기 같은 귀중한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사기록은 일체 외면하고 지나(중국)측 기록만을 참고로 했다. 김부식은 묘청대사가 주장하는 단군조선의 자주적인 상고사 기록을 완전히 빼버리고 말았다.
둘째 김부식은 엄연히 우리 민족 국가인 대진국(발해)을 완전 삭제해버림으로써 다물정신을 없애버리는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같은 치욕적인 과오를 범하게 만든 먼 원인이 되었다.
셋째 고구려 본기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기사들을 신라본기에 집어 넣었다. 예컨대 "고구려 미천황 14년(서기 312년) 15년에 낙랑, 대방 2군을 쳐들어가 빼앗았다"던가. "신라 실성왕 12년(서기 413년)에 평양에 큰 다리를 놓았다" 던가 하는 기사는 응당 고구려 본기에 들어가야 하는 역사데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신라본기에 집어넣은 실수를 범했다. 이밖에도 이와 비슷한 착오가 숱하다.
넷째 김부식은 또한 지금의 "평양이 한의 낙랑군"이라고 단정하는 크나큰 과오를 범함으로써 역사를 크게 오도했을 뿐만 아니라 왜식 사학자들이 이것을 금과옥조로 삼아 식민사관을 정립하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반도 내에는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이 1990년도부터는 교과서에서도 삭제 당하게 된 것은 뒤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한 일이다.
다섯째 김부식은 우리 겨레와 국가의 영예로운 역사 사실은 기록하지 아니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예컨대 고구려와 백제가 4백년간이나 중원대륙을 경영했던 사실은 지나의 <이십오사>가 인정하는데도 이를 고의적으로 빼 버렸다.
여섯째 김부식은 지나인들이 날조해 낸 기자조선을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주나라 초기 이래 우리가 지나인의 속국이나 된 것처럼 왜곡하여 모화사상을 확립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왜곡이었으며 그 장본인이 바로 김부식이었고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신라를 정통으로 인정해 ‘신라본기’를 책 첫머리에 두고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역사 등 그 이전의 기록을 몽땅 없애버렸다. 중국 한무제 때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의 ‘조선열전’도 제법 상세하게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대항해 싸운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김부식이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역사를 몽땅 없애버린 것은 이완용 못지 않은 역사의 대죄를 저지른 것이다.
기타 사서들의 사대성
일연의 『삼국유사』도 사실은 많이 왜곡이 돼 있는데…. 고조선조에서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그 환국을, 자신이 주(註)를 달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꿔 놓는다. 역사를 불교신화로 채색을 해 버린 것이다.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고, 거기다 단군 왕검의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 고조선의 광활한 활동지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해 버렸다.
조선시대에 와서 서거정의 『동국통감』을 보면, 단군조선의 역사를 다루긴 하는데, 저 바깥으로 떼어놓고는 다른 나라 역사처럼 다룬다..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 다음에,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같은 걸 보면, 우리의 역사를 ‘기자(箕子)’부터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단군왕검의 사적은 기자동래(箕子東來)의 밑에다 적고 있다.
그 외에 정인지의 『고려사』, 한백겸의 『동국지리』,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등.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이 전부, 역사를 쓰는 족족 다 왜곡을 시킨다. 역사를 쓰는 사람마다. 벌써 그 당시에는 환경자체가 그렇게 분위기가 돼버린 탓이다. 김부식만해도 고려 중기 때인데, 조선시대 때까지, 500년 이상이 흘러오는 동안 그렇게 왔는데, 그 역사에 대해 주체성을 가지고 반기를 들었다 하면 그 사람은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가, 이렇게 사대주의사관에 의해서, 이 중독에 의해서 철저하게 왜곡이 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모든 역사, 조선시대의 모든 역사가 다 왜곡이 된 것이다.
2. 왜독(倭毒) :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우리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서적을 약탈하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전부 일제 수색을 한다. 그래서 그 다음해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서적을 약탈해 간다. 그 때에 어느 정도 가져갔느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박창화씨가 증언한 것처럼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서적이 일본에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서적 약탈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한다.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사료를 수집해서, 『조선사(朝鮮史)』를 편찬한다. 그래서 1938년까지 35권, 본문만 35권이 되는 『조선사』라는 역사책을 일본인들이 만든다.
우리의 역사는 5∼6천년이 되니 그 절반도 안 되는 일본의 역사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원래 1,300년밖에 안되는 일본의 역사를 2,600년으로 엿가락처럼 늘이고, 내선일체를 주장하기 위해선 자기 역사가 더 길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 관련된 기록을 다 없애 버린 것이다. 즉, 단군조선을 생략하고 바로 상고삼한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그리고 일본의 식민정책사로 역사를 꿰어 맞춘 것이다.
국조(國祖)와 상고사(上古史)의 부정, 한민족은 ‘한반도에만 국한되어 살았던 민족’이라는 반도사관, 그리고 천하고, 열등한 민족성을 부각시키 데 초점을 맞춘다. 즉, 조선 민족은 이제까지 완전한 독립을 해본 적도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다. 전국시대에 유랑민들이 떠돌아 들어온 것이 한반도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유랑해 온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만 일삼는 나라로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져 싸움박질만 하고, 고려시대에는 음탕한 역사가 진행됐고, 조선시대에는 사색당쟁이라든가 사화라든가, 이렇게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맨 싸움만 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추진력이 없이 살아온 미개민족으로 보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조선민족을, 대동아의 미래를 책임져야할 일본이 합방해 가지고 보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식민사관의 목적인 것이다. 일제시대 때 역사를 그렇게 배웠던 사람들이 쓴 것이, 지금도 한국의 역사 교육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편수회에, 한국사람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중에 바로 이병도와 같은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李丙燾)는 이완용의 질손이다. 이완용은 고문으로 되어 있고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뻔히 알면서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합법과 국가의 비호 아래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대학 강단을 점거했던 것이다. 더욱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해방이 된 후, 모두 불살라 버렸어야 할 그 기록들이 다시 국정교과서에 그대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제 민족을 팔아먹었던 일제 앞잡이들이 다시 정권을 잡고서는, 자기들이 뜯어고치고 날조시킨 국사 교과서를 가지고 다시 이 땅의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과정은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병도 =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 가 되었고, 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또 강단 주류학파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지금도 사학계를 주도하고 있으니, 지금의 우리는 갈기갈기 찢겨지고 왜곡된 식민주의 사관을 그대로 전수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 (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유원동, 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 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씨는 몇 해전 타계하였고 죽기 전 친구의 설득으로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또 김원용씨는 일본이 날조해 낸 황국 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 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이 자는 을지문덕이 중국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혜성의 사나이 이기동씨가 있다. 87년 5월 29일, 30일에 있었던 역사학 대회에서 고대사 되찾기 운동을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70 년대와 유신 체제의 분위기의 연장" 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는 또 "실증 사학이 마치 식민 사관의 장본인 인양 단정되고 일부 민족 민중 사관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선 고대사 연구는 존립 기반이 질식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고 지껄이고 있다.
이러한 자들이 주름잡고 있는 사학계의 현실 속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국공립 대학의 인사권 독점)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까지 이런 작업에 끼어 들었다. 이들은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국사 교과서에서 아예 빼 버리자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한국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갈래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 이것이 안되니까 한국의 국조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이 단군 국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연세대 교수 김동길씨의 단군성조에 관한 견해를 보자.
"곰과 인간의 염색체수가 다른데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또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들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원전 60년에서 20년 사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 2천년쯤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런 자들 때문에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어도 우리의 역사가 해방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금세기 초만 해도 단군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통일되어 있었다. 1907년 순종 1년 때 발행된 역사교과사인 『동국사략』을 보면 고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국조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들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일제의 상고사 말살 정책 때문이다.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 한 일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이었다.
우리 나라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인들이 왜곡한 식민사관에서 아직도 헤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강단에 있는 사학자들이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된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식민사관의 굴레를 쓰고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된다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구역질이 난다.
3. 양독(洋毒) : 실증주의사관
근래에 타국에 유학 갔다온 역사학자들을 보면, 실증주의 사학이다, 랑케사학이다 하면서, ‘유물이 안 나오면 안 믿는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우리 역사는 갈수록 짧아져서 필자가 국사를 배울 때 분명 실존인물로 배웠던 동명성왕마저도 전설 속의 인물로 바뀌어 버린지 오래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은 커녕 고작 2,000년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식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역사를 줄이면 줄일수록 더 기고만장하고 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실증사학이라는 도구는 식민사관의 대체품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다.
① 실증사학의 배경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이태리의 파스즘은 국수주의를 내걸어 자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각색하여 국민을 오도하더니 마침내 파멸을 가져온 전철을 밟았다. 2차대전에 패전한 독일의 사학자들은 역사에서 국수주의가 국가를 멸망으로 몰고 온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실증사학을 주장하여 과장된 맹목적인 국수주의를 역사에서 탈색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랑케는 "전 시대를 관철하는 이념이란 없다. 이념이란 각 시대에 갖는 경향에 불과하다. 각 시대는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치스 독일에 파국을 가져온 역사적 배경 하에서 이러한 실증사학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무비판적 수용: 그런데 한국은 어떠했는가? 신라가 동족의 국가 고구려,백제를 배반하고 당나라라는 외세를 업고 이들 두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싹트기 시작한 사대주의가 무려 1천 2백년 이상 이 나라 사학계를 지배하여 왔고 더구나 일제 식민사학까지 가세, 이 나라의 사학은 중화독과 왜독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인 현실과 과대한 애국주의, 국수주의의 고취로 국가를 멸망시킨 독일,일본,이태리의 경우와는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한국적인 배경에서 랑케의 실증사학을 아무런 검토없이 한국사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영양과다로 비대증에 걸려 몸을 가눌 수 없이 뚱뚱해진 사람과 영양실조로 말라서 피골이 상접한 말라깽이에게 똑같은 처방으로 수술을 하고 약과 주사를 주어 살을 빼자는 수작과 똑같은 일이 아닌가? 외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적인 독특한 상황을 전혀 고려도 하지 않고 외국문화를 그저 털도 안 뽑고 삼켜버리자는 젖비린내 나는 수작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③ 실증사관을 올바르게 적용하지도 못했다. 랑케의 말대로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 하는, 원래의 진상과 사실을 추구한다는 기본이념까지 망각하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테두리 안에서만 한국사를 논했으니 진정한 의미의 실증사학이라 할 수조차도 없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인 사학자들의 실증사관이 가장 선진학설이요, 가장 권위있는 사실(史實)인 양 이에 매혹되어 이를 인용하는 것이 큰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는 전제하에 전부 서술의 대상에서 빼어버림은 물론 우리 국민의 역사상식에 속하는 4,300년 전의 단군개국 사실까지도 그에 관하여 고래(古來)로부터 면면히 전승되어 오는 사적(史籍)들이 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적들에 대한 일체의 고증(考證)을 무시하고, 청동기 문화가 들어온 BC1000년경에 부족장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다느니, 철기문화가 들어온 BC400년경에 단군부족장이 눈부신 발전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등 단군의 개국기 연도와 그 본격적인 국가형성시기를 1,300년 내지 1,900년을 깎아내려 놓음으로써 일제 식민지 사관을 한층 굳혀 놓았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일제가 심어놓은 해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광복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열등적인 민족의식에로 한 없이 끌고가는 망국적(亡國的)인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학계의 실상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를 건국신화나 전설로부터 시작되는 바 이 신화, 전설은 각자 그 민족의 얼이 담겨있고 그 민족 통합의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애국심발로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금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적 방법이 역사학에 도입된 이후, 고대사회의 개략적 문화변천 발전과정 생활양식 등을 파악하는데 적지 않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컨데 단군조선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은 현존 고사적을 종합하여 볼 때 만주와 중국대륙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도 남반부 만의 고고학이 우리 고대사를 조명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며 설사 고고학적 유물이 나왔다 할지라도 자료의 침식, 문자판독의 난해성 등 올바른 사실(史實)을 밝혀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실사(史實史)는 결국 역시 아직도 기존 고사적(古史籍)과 문헌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위 실증사학에 있어서도 상고사분야에 관해서는 문헌고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사 연구를 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현존하는 모든 고사적(古史籍)과 문헌들을 수집, 비교분석하여 그 가운데 보다 객관적 타당성과 합리적인 사실(史實)을 택하여 이를 기초로 우리 정사(正史)를 정립하여야 할 것이고, 그 가운데 비록 신화-전설적 사실(史實)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후세에 터무니없이 위작되었다는 사실이 육하원칙에 의해 입증되지 못하고 있는 한 참고로라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여야 할 것이며 만약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여 어느 일부 사실(史實)에 의해 기존 사실과 다른 새로운 사실이 판명되었다면 그 사실은 대체시키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실분야에 관한 기존 문헌까지 함부로 위서(僞書)라고 단정하고 그 사실을 역사 서술에서 빼어 버린다는 것은 소위 고증을 위주로 하는 실증사학에 있어서의 올바른 학문적 태도라고 볼 수 없다.
가령 3백년 전에 살았던 10대 조상의 무덤을 파보면 특수한 경우를 빼놓고는 그 무덤 속에서 유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무덤에서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족보의 기록을 믿을 수 없으니 10대조 할아버지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족보가 위조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10대조 아니라 100대조 할아버지라도 생존했었다는 것을 어찌 부정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고대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중국, 몽고, 만주,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열도 등인데 현재 한반도, 그것도 반쪽에 불과한 남쪽에 있는 우리가 고고학을 위주로 상고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상고사 분야에 있어선 문헌 고증을 통해 역사를 기술함이 주(主)가 되어야 하고 고고학적 실증은 부(副)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사학계는 고고학이 주가 되어 상고사를 마구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실증사관의 탈을 쓴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직도 해방이 되지 않고 있다.
4. 외래 종교의 폐해
1) 유교의 폐해
유교는 중국중심주의 즉, 중화(中華)사상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중국 주위에 있는 민족은 다 오랑캐인 것이다. ‘동이(東夷)’라고 할 때, 이(夷)자를 우리 스스로 "오랑캐 이"자라고 읽고 있는 지경이다. 우리 민족 스스로 오랑캐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분 못하는 정신나간 학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사서를 보면 그들은 동이족을 존경하고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1102년 고려 숙종 7년에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어요. 그런데 ‘아, 여기 말이야 기자(箕子), 은나라의 3현 중 한 사람이었던 기자가 와서, 조선에서 왕 노릇을 했다고 그러는데, 기자의 무덤이 있습니까?’ 기자가 있긴 뭐가 있어요. 기자가 도망간 데는 ‘섬서성 태원현’이에요. 우리 나라에는 없어요. 그런데, 정문(鄭文), 예부상서 정문이라는 사람이 평양에 기자묘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무주고총(無主古?), 주인 없는 무덤 하나를 만들어서 이것이 기자묘(箕子墓)다 하고서는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그곳이 본래 단군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어요. 그 어떤 제사를 지낼 때, 주된 신을 주벽신(主壁神)이라 그러는데, 원래 단군 할아버지가 주벽신이었어요. 그런데, 단군 할아버지는 저 서향(西向)으로 만들어놓고, 기자를 주벽으로 딱 만들어 놓은 겁니다. 게다가 기자는 초하루 보름마다 제사를 지내고, 단군 할아버지는 봄가을로 한번씩 지내고. 고려시대 때 또 그렇게 육갑잔치를 했었어요.
기자는 무슨 얼토당토 않는 기자냔 말이에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신나간 행동 한 것을 보면, 책을 다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참, 어떻게 우리 민족이 이렇게 정신나간 민족인가? 사대주의에 쩔어 있었기 때문에, 사대주의에 쩔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시 했던 거예요. 유교의 피해라는 게, 정신을 홀딱 훑어 가버렸거든요. 그런 피해가 있었어요.
불교에 의한 피해는 앞에서 삼국유사 얘기하면서 잠깐 다루었는데, 다른 종교에 비하면 그래도 피해가 덜한 편이다.
2) 기독교의 폐해
필자는 앞에서 기독교를 반민족적 종교라고 규정했다.
구약성서는 유대민족의 선민(選民)사상, 유대민족의 국수주의(國粹主義)가 짙게 배어있는 유대민족의 역사서일 뿐이다. 여호와신은 유대민족의 신으로서 유대민족을 가나안땅에 안착시키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전쟁신이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신을 받드는 한 기독교인들은 반민족적이 될 수밖에 없다. 김용옥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제시대 때의 신사참배나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야훼참배는 동일한 형태의 반민족적 행위인 것이다.
유교의 중화사상에 오염된 유교 사대주의자들이 쓴 책을 보면 중국의 사서를 기준으로,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조선을 스스로 비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위대한 이퇴계, 이율곡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존유대주의에 오염된 기독교 사대주의자들이 쓴 책을 보면, 성서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재단(裁斷)하고 있다. 현대의 함석헌, 김동길 같은 학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목사들에 이르기까지 단군신화 운운하며 스스로 곰새끼라고 외치고 있다.
성서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 했다고 자기민족의 시조 단군동상의 목을 자르고, 민족문화 유산인 장승, 불상 등을 마구 훼손하는 그들의 하드웨어는 국산(國産)인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유대産인 것이다. 어떻게 공자가 조선에 들어왔으면 조선의 공자가 되어야지 공자의 조선이 되며, 예수가 조선에 들어왔으면 조선의 예수가 되어야지, 예수의 조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오랫동안 사대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민족의 운명이란 말인가?
민족의 문화를 부정하고,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러한 외래종교에 의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또 그렇게 왜곡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역사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제공자는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밖에는 모른다. 우리나라의 다른 사서에는 고조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고 있으며, 중국의 사서들은 단군조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그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라고 말했던 최태영 박사같은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 최태영박사가 말했듯이 "너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무식하고 유대역사에 대해서는 입에 침 튀겨 가면서 떠드는, 유식한 척 하는 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기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